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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KoreaTraveller

독일 역사와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여행코스

by 권또또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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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의 대이동

우리나라가 한민족인 것처럼 독일도 고대 게르만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독일은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살고 있었다. 켈트족은 농사를 짓고 살았고, 게르만족은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다. 본래 독일 땅이 농사짓기에 적합지 않은 땅이라 켈트족은 현재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농사짓기 좋은 땅으로 이주했다. 그러니 독일 땅은 게르만족만 남은 척박한 땅이었다. A.D.300년경 로마제국은 부와 명예는 있었지만 호전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유전적으로 덩치가 크고 강한 힘을 지닌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A.D.375년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에 훈족이 침입해 들어오면서 게르만족은 독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것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부른다.

 

로마제국의 멸망

당시 게르만족도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 등 다양한 부족들이 있었다. A.D.467년 게르만인 장군 오도아케르(Odoacer)는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여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 왕국

처음에는 많은 게르만 왕국들이 있었지만 여러 문제로 무너지고 프랑크 왕국만 새 역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듯이. 그 후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481∼751)와 카롤링거 왕조(751∼843)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로마제국의 뒤를 이었다. 프랑크 왕국이 400년간 지배했는데 A.D.840년 프랑크 왕국의 루이 1세가 죽자 세 아들이 영토문제로 싸움을 벌였는데 베르됭 조약(Verdun, 843)을 통해 세 나라로 나뉜다. 그 후 장남이 죽자 루이 2세와 카를 2세가 큰 형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 조약을 메르센조약(Mdrsen, 870)이라 한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서프랑크는 프랑스로, 동프랑크는 독일로 분리된다. 실질적인 독일의 역사는 843년 베르됭조약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동프랑크 왕국

동프랑크왕국은 지방호족의 힘이 강한 까닭에 왕권이 약했다. 그래서 919년 작센 지방의 호족 하인리히 공작(Heinrich 1세, 919∼936)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된다. 역사학자들은 한인리히 1세를 독일의 첫 번째 왕으로 꼽는다. 936∼973년까지는 하인리이 1세의 아들이 교회를 이용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오토 1세로 즉위한다. 오토 1세는 헝가리에 침입한 마자르족을 격퇴하고 이탈리아의 내란을 진압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워 로마제국의 황제(962년)가 된다.

 

 

신성로마제국(962∼1806)

오토 1세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동프랑크 왕국의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844년간 존속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국내문제보다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의 문제에 몰두함에 따라 지방호족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발생했다. 그들의 세력다툼으로 1256∼1273년까지 17년간 대공(大公)이 다스리는 국가라 하여 공국이라고 부른다. 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프로이센 공국, 뷔르템베르크 공국, 헤센 공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독일의 행정구역을 나누는 근거가 된다. 그 당시의 제국이란 이름은 허울뿐이었다. 그만큼 1300년경부터 300여 개의 크고 작은 지방 세력들이 활개를 쳤고 1500년대의 독일 안에는 크고 작은 세력들이 싸웠다. 바로 그 중심에 1517년 독일 농민의 아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날렸고 1618∼1648년까지 구교와 신교 사이의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가 구교파를 지지하자 덴마크와 스웨덴이 신교파를 지지했고, 오스트리아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프랑스는 신교파를 지지했다. 그만큼 그 당시 유럽은 종교 전쟁의 싸움터가 됐다. 이 전쟁으로 독일 인구 3분의 1이 죽었다. 결과적으로 신교파가 승리했고 뮌스터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은 3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갈라서게 됐다. 신교를 믿던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했고, 프랑스는 독일 영토 알자스 지방을 얻게 됐다. 이때 칼뱅의 개혁파가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면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가 주요 3대 종파로 자리를 잡았다.

 

프로이센의 등장과 독일제국의 성립(1871∼1918)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 이후 독일은 30여 개 나라로 분열됐는데 남쪽은 오스트리아 왕국이, 북쪽은 프로이센이 세력을 확장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1640∼1688)은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그는 매우 검소하고 근면하며 규칙을 잘 지켰는데 ‘프로이센의 정신’이란 말도 그로부터 생겨났다.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제(1712∼1786)가 확장한 영토와 승리는 대부분 독일 내 다른 국가들을 희생시켜 얻은 결과였다. 그는 프로이센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작센에서는 악당이었다. 더욱이 7년 전쟁 동안 작센을 철저히 유린했고 1760년에는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무참히 파괴했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꺾고자 남쪽과 서쪽과 동쪽 사방에서 함께 진격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표트로 3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도우면서 프로이센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후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Bismarck, 1815∼1898)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각각 승리한다. 이를 통해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1781∼1888)가 황제로,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취임하는 통일된 독일제국을 수립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29살에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축출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한다. 그 무렵 세르비아인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 공을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1914.6.28.)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 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패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k)이 탄생한다. 독일제국이 붕괴되면서 독일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전환된다. 1919년 2월 독일은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여 18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을 선포한다.

 

나치즘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

막대한 전쟁 배상금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극심한 수준이었다. 국민의 삶은 곤궁했다. 1923년 독일의 통화 마르크화 가치는 휴지조각이 됐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쇠퇴의 길을 걸을 때 독일 노동당이라는 단체가 바이에른 지역에 설립됐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단체에 나치스(Nazi)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후 농민을 포함해 중소 시민층과 국수주의자와 대자본가의 지지를 받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NSDAP,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전후 독일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다. 1932년 나치당이 제1당이 되고 1934년 히틀러가 총통이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한다. 1936년 히틀러의 나치당은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고 1939년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인종청소를 근거로 수백만의 유대인과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했다. 전쟁에 미쳐있던 독일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와 소련 연합군의 총반격으로 궁지에 몰린다. 히틀러는 4m 두께에 15m에 달하는 지하 콘크리트 벙커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27일 소련군이 지하벙커가 있는 베를린 시내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4월 28일, 히틀러는 12년을 함께한 연인 에바 브라운과 지하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비서에게 유서를 썼다. 4월 30일 소련군이 도로를 하나 남긴 지점까지 진격하자 히틀러는 침실에 들어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동서독 분단의 시대(1945∼1990)와 통일독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민주주의 진영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통치하는 서쪽과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이 통치하는 동쪽에서 각각 독자 정부를 수립해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그 당시 독일에 합병됐던 오스트리아는 1955년에 주권을 회복했다. 이후 서독은 미국의 경제 원조와 시장경제 체제를 통해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을 막고자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그 장벽은 길이가 160km였고 밖에는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 설치됐다. 감시탑 300여 개, 경비견 600여 마리, 군인 14,000여 명을 통해 장벽 주위를 철저히 감시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동독의 경제가 추락하고 서독의 포용과 소련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통일을 이뤄 하나의 독일이 됐다.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농부 한스 루터(Hans Luther) 와 마가레타 루터(Margaretta Luther)의 아들로 태어난다. 루터의 부모는 아이슬레벤(Eisleben)의 농부 생활에서 만스펠드(Mansfield)의 광부 생활로 일하다가 7년 뒤 구리 광산업을 경영하고 성공해 중세 말 한창 득세한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 된다. 그의 부모는 엄격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였다. 어린 시절 루터는 만스펠드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루터를 법률가로 키우고자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냈다. 루터의 남동생에겐 광산업을 물려주고 루터를 변호사로 키우려 한 것이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루터는 인문과학 학사과정을 밟았는데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공부했고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해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505년 루터는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 인근에서 도보여행 중 벼락을 맞는데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통해 그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회(Augustinian Monastery)에 들어간다. 그의 나이 21살때다. 1507년 4월 3일, 드디어 에르푸르트 주교좌가 있는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한 달 뒤인 5월 2일 루터는 첫 미사를 집례한다. 그즈음 루터는 다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했고,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긴 뒤 1509년 3월 성경학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1512년 10월 18∼19일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때가 28살이었다. 1513년 그는 시편을 강의했고, 1515년 가을엔 로마서를, 1516년∼1517년엔 갈라디아서를 강의했다. 그렇게 교수 사역을 하면서 성경주해하는 일에 집중했다. 1513년부터 2년간 시편을 강해했고, 1515년부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1517∼1518년까지는 히브리서를 주해했다. 그러던 중 루터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개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죄를 용서받는다는 전통이 있었다. 루터도 그곳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던 중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로마서주해가 떠올랐고 이신칭의 사상이 빛처럼 다가왔다.

 

그 당시 부패한 로마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 기금을 마련코자 면벌부를 판매했다. 면벌부 판매 설교자로 활약한 요하네스 테첼은 “헌금이 상자 속에서 찰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지옥 불 속에서 뛰어나온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루터 앞에서도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루터는 그것이 가난한 민중을 등치는 사기라고 여겼다. 1517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슐로스 교회 Schlosskirche) 출입구에 95개 논조를 붙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마르틴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보호했다. 1518년 4월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회의에 참석하여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며 40개 논제를 설명했다. 1520년 종교개혁에 관한 가장 위대한 책 세 권 곧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출간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의 젊은 황제 카를 5세(1500∼1558)는 보름스 의회에 루터를 소환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700km가 넘는다. 루터의 주변 동료들은 체코의 얀 후스처럼 루터도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말렸다. 하지만 루터는 극구 나갔는데 교황의 교권보다 성서의 진리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함이었고, 당대에 그를 지지한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해 칼 슈타트와 멜란히톤 교수 그리고 전투용 도끼를 들고 루터의 뒤를 따른 200여 명의 학생이 동행한 까닭이었다. 보름스 의회에 출석한 첫날 루터는 기가 눌려 처음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그는 로마 교황청의 어긋난 논조와 그릇된 행보를 당당하게 반박했다. 1521년 5월 25일 보름스 의회는 칙령을 통해 루터를 정죄하고 이단자로 선언했다. 그때 교황과 황제의 최측근들은 루터를 제거하려 했다. 그래서 귀향 8일째 되는 날 복면의 괴한에게 덮쳐 루터가 피습되는 줄 알았는데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빼돌려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시켰다. 그 성의 독방에서 루터는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11주 만에 과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패기만큼은 루터 못지않은 비텐베르크의 인쇄공 멜히오르 로터가 2교대로 인쇄를 진행했다. 1522년 9월 말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가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에 출품됐고 독일 전역으로 배포돼 매진됐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추가 12판이 정식 출간됐고 해적판도 50개가 넘었다. 그러자 루터는 구약성서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비텐베르크에서 결혼했고 1527년 7월 아버지가 됐다. 루터의 나이 43살때였다.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8년 동안 6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1534년 루터가 번역한 신구약 성서 전체가 독일어로 번역 출간됐다. 그 성경은 1455년 마인츠의 혁명적인 인쇄술을 개발로 찍은 구텐베르크의 성경이 나온 지 7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 일에 대해 루터는 1530년에 출간한 〈번역에 관한 공개서한〉에서 솔직하게 털어놨다. 라틴어나 그리스어 단어 하나하나를 번역하려고 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독일어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이다. 당시 독일 북부의 방언은 저지독일어였고 독일 남부 방언은 고지독일어였는데 루터는 두 방언을 절충하여 누구라도 뜻이 통하게 번역했다. 그만큼 거창한 단어는 피하고 지역의 관용구와 일상의 통속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의 독방에서 신약성서를 번역한 도시 아이제나흐에는 고딕 양식의 성 게오르크 교회(St George's Church)가 있다. 200년 뒤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는 어린 시절 그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성가를 불렀다. 그는 루터의 저작 전집 두 질을 구입했는데 루터가 없었다면 그의 유명한 ‘마태 수난곡’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터가 만든 독일어, 동화, 자연 풍경에 대한 기억 외에 말과 지역이 다른 독일인을 하나로 묶은 이가 있었다. 바로 괴테다. 미국인이 신 아래 한 민족이라면 독일인은 괴테 아래 한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74년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을 뒤흔든 베스트셀러가 됐고, 1808년 세상을 탐구하고 이해할 능력을 얻고자 악마와 계약을 맺은 한 남자를 그린 희곡 〈파우스트〉는 독일인다움을 과시한 작품이다. 루터가 현대 독일어를 완성했다면 괴테는 현대 독일어를 꽃피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불을 붙인 루터를 두고 가톨릭에서도 비난했지만 독일 농민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루터의 개혁성향 때문에 농민들도 처음엔 루터를 정신적 지도자로 추종했다. 성서를 민중의 언어로 번역했고 신 앞에 만인이 동등하다고 외쳤기 때문이다. 토마스 뮌처(1489∼1525)도 151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다닐 때 루터의 글을 접하며 열렬한 추종자가 됐다. 그러나 뮌처는 광신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고 혁명을 위해 신학적 기초를 쌓았다. 그가 꿈꾼 천년왕국은 성직자 귀족 평민 농부 등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를 위해 악한 세력과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1524년 독일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초기 무렵엔 루터도 농민들의 입장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농민봉기가 점차 폭도로 변하자 그들의 혁명이 그릇된 방법이라고 경고하며 권세자에게 복종할 것을 설교했다. 더욱이 루터는 과격한 뮌처를 향해 이단과 분열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런데 농민 폭도들이 루터의 눈앞에서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도륙하는 장면을 목격하자 루터는 농민들을 미친개로 여기며 위정자들에게 찌르고 치고 목을 비틀어 진압토록 주문했다. 1525년 5월 농민전쟁은 통치자들에 의해 프랑켄하우젠에서 완전히 진압됐다. 그때 10만∼15만의 농민이 학살됐다.

 

1546년 1월 17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했다. 그전부터 여러 건강상의 문제와 몇몇 상황들이 루터를 괴롭혔다. 멜랑히톤과 관계를 파괴시킬 정도의 성만찬 논쟁, 일부 회중교회들이 교역자의 사례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는 문제, 동료개혁자들과 토론할 때 그를 거칠게 대하는 정서적 문제, 젊은이들이 부모와 보호자 동의 없이 비밀 결혼서약을 하는데 가톨릭교회가 승인할 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의 판사들이 그 서약을 무효화하지 않는 문제, 젊은 여성들이 가슴이 패인 옷을 입고 대학에 들어오는 문제 등. 그런 상황에서도 트렌트 회의와 관련하여 루터는 교황제에 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루터가 태어난 고향 마을 아이슬레벤에는 만스펠드 백작과 그의 형제들과 광산 이권에 관심이 많던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깊었는데 그들 모두가 루터의 판단과 결정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루터는 만스펠드 백작의 간청을 받아들여, 당시 건강상의 문제로 아내를 홀로 남겨둔 채, 두 아들 마틴과 파울을 데리고 아이슬레벤으로 출발했다. 여행은 심한 폭풍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강물이 둑에 흘러넘쳤고 다리가 떠내려가는 위험에서도 할레에 도착해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했고, 1월 28일엔 아이슬레벤에 도착했다. 루터는 아이슬레벤의 성 안드레아스 교회(St. Andreaskirche)에서 1월 31일과 2월 2일, 2월 7일, 2월 14일 4편의 설교과 함께 두 차례의 성만찬을 집례했다. 2월 14일에는 안드레아스 크라우제와 에사이아스 발라를 목회자로 임명했다. 2월 17일 저녁 식사 후 새벽 1시쯤 심장 발작을 일으킨 루터는 죽음을 직감했다. 할레에서부터 동행한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는 루터의 임종이 가까운 걸 알고 임종 전 증인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중세 시대 임종을 앞둔 사람의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요나스는 루터에게 “존경하는 목사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을 고백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루터는 짧게 “예”로 대답했다. 그런 질문들을 몇 개 더했고 루터는 그때마다 예로 대답했다. 얼마 후 루터는 의식을 잃었다. 1546년 2월 18일 새벽 2시 45분, 루터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루터의 생애를 따라가는 독일 여행코스

프랑크푸르트 공항→하이델베르크→보름스: 129km, 1시간 34분

아이슬레벤→아이슬레벤 안드레아스교회St. Andreaskirche→만스펠드→에르푸르트대학→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Augustinian Monastery:104km, 1시간 40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비텐베르크대학→비텐베르크 슐로스교회Schlosskirche:200km, 2시간 20분

비텐베르크 슐로스교회→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St George's Church):270km, 3시간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프랑크푸르트 공항: 198km, 2시간

 

 

독일 여행 주의사항

독일은 베를린을 제외하면 대도시라 부를만한 곳이 드물다. 대도시라고 부르는 뮌헨이나 함부르크도 인구 200만 명이 안 된다. 그만큼 독일은 걸어서 3~4시간이면 다 구경할 수 있는 예쁜 소도시가 수십 곳에 이른다. 독일에서는 걷는 만큼 여행의 만족도가 정비례한다.

독일 기온은 섭씨 8∼10℃로 한국보다 낮아서 따뜻한 옷을 챙겨가야 한다. 겨울엔 너무 춥고 여름에도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하다. 봄과 가을과 겨울에는 비가 자주 오는 곳으로 우산이나 비옷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 여름철에 돈을 쓰지 않고 쉬려면 교회예배당을 찾아가면 된다. 대부분 교회가 종교행사 시간을 제외하고 일과시간에는 문을 열어둔다.

독일에선 현금이 꼭 필요하다. 카페나 빵집이나 식당에서도 현금을 원하는 곳이 많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 팁은 10%가 적당하다. “Stimmt so”(스팀 조, 잔돈은 됐어요)라는 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더욱이 독일의 수돗물은 석회질 함량이 많아 대부분 탄산수를 마신다. 탄산수가 아닌 물을 원할 때는 잘 살펴봐야 한다.

독일은 한국과 달리 건물이나 상업시설에서 화장실을 개방하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 급하게 찾아갈 화장실은 없다. 틈나는 대로 미리 해결해 둬야 한다. 고속도로 휴게실을 이용할 때 유로화장실이 많아 동전을 챙겨야 한다.

독일의 교차로는 베를린을 제외하고 신호등의 녹색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직접 버튼을 누르거나 누군가 문질러줘야 신호등이 바뀐다. 그뿐만 아니라 선 없는 횡단보도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독일의 혼욕 사우나는 일본의 혼탕문화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다. 그만큼 가족단위의 문화다.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작센안할트, 브란덴부르크, 튀링켄, 작센 등은 구동독 지역으로 외국인 혐오증이 심하다. 이런 지역은 홀로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피해야 한다. 물론 다른 지역들도 밤거리나 기차역 등에서 호의를 베풀며 다가오는 이들은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 난민이거나 이민자 출신으로 뒷돈을 요구한다.

 

*주독 한국대사관

*함부르크 총영사관 040-6506776-00

*외교통상부영사콜센터 00-800-2100-0404

*독일경찰서 100

*긴급의료기관요청 31-00-31

 

[참고도서]

이원복, 〈이웃나라 3 도이칠란트〉, 김영사, 2018.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김희주 옮김, 옥당, 2019.

이케가미 순이치, 〈숲에서 만나는 울울창창 독일역사〉, 김경원 옮김, 돌베개, 2018.

유상천, 〈유피디의 독일의 발견〉, 꿈의지도, 2016.

박성숙,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21세기북스, 2012.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역사〉, 반성완 역, 지와사랑, 2011.

고유경, 〈독일사 깊이 읽기〉, 푸른역사, 2017.

손선홍, 〈도시로 떠난 독일 역사 문화 산책〉, 푸른길, 2020.

벤저민 카터 헷,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이선주 역, 눌와, 2022.

제바스티안 하프너,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안인희 역, 돌베개, 2016.

배리 토말린, 〈세계 문화 여행 독일〉, 박수철 역, 시그마북스, 2021.

안정오 〈세상을 변화시킨 독일인들〉, 푸른사상, 2022.

유시민, 〈유시민과 함께 읽는 독일 문화 이야기〉, 푸른나무, 2006.

로버트 S.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송충기 역, 을유문화사, 2011.

장기호, 〈독일여행의 시작〉, 사람의무늬, 2014.

유시민, 〈유럽도시기행 2〉, 생각의길, 2022.

장수한,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한울, 2016.

제임스 레스틴, 〈루터의 밧모섬〉, 서미석 옮김, 이른비, 2016.

헤르만 셀더하위스, <루터, 루터를 말하다>, 신호섭 옮김, 세움북스, 2016.

롤런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생명의말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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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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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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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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