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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체코 역사와 종교개혁자 얀 후스 여행코스

by 권또또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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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간략한 역사와 종교개혁자 얀 후스

 

1. 고대시대

AD 5C말~6C초 민족대이동기에 슬라브인 정착 시작

7C초 슬라브 부족국가인 SAMO 제국 성립

9C초 대모라비아 제국 성립- 체코족과 슬로바키아족이 결합된 초기국가 형태

 

2. 보헤미아 왕국시대(10세기∼1526년)

870∼1306 프르제미슬 왕조 - 체코 국가 탄생, 프라하가 왕국의 수도

1310∼1378 룩셈부르그 왕조(체코 역사상 황금기)

1355년 찰스 4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로, 프라하가 제국의 중심으로 등장

1419∼1436 후스 전쟁-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Jan Hus가 1415년 화형에 처해짐으로써 촉발된 전쟁. 1436년 후스파와 교황청간 화약의 성립으로 후스주의 공인

 

3. 합스부르그 왕조시대(1526∼1867)

1618∼48 30년 전쟁

1740∼90 계몽전제군주시대-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그가의 통치하에 오스트리아제국의 1개주로 편입되고, 공식언어로 독일어 채택

1840년대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체코 및 슬로바키아 민족운동 전개

 

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배시대(1867∼1918)

1914∼18: 제1차 세계대전 - Masaryk, Benes, Stefanik 등에 의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운동 전개

 

5.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시대(1918∼39)

1918.10.28.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선포- 초대 대통령 Tomas Masaryk

1920.2.29. 민주공화국 헌법 제정

1938.9.29. 영국과 프랑스의 대륙 유화정책의 상징인 뮌헨조약에 의거,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Sudetenland 지역 병합

 

6. 제2차 세계대전(1939∼45)

1939.3.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1941.7. 임시정부 성립

1945.4. 소련군에 의한 체코슬로바키아 해방 및 제3공화국 성립

 

7. 공산주의 시기(1948∼1987)

1968.1. Alexander Dubcek 공산당 제1서기 선출-자유주의 개혁 운동 추진

1968.8. 프라하의 봄

1968.8.20. 바르샤바 조약국 군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8. 1989년 이후

1989.11. 벨벳 혁명을 통한 자유민주정부 탄생-12.29. Havel 대통령 선출

1993.1.1.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해체, 체코공화국 탄생

1995.12. OECD 가입

1999.3.12. NATO 가입

2004.5.1. EU 가입

2009. EU 순환의장국 수임

 

종교개혁자 얀 후스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이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이가 있다.

얀 후스(1369~1415)가 그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인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모국어로 설교하면서 교황을 우상시하고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죄로 화형당한 개혁자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후스는 29살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살에 총장이 되어 얼마든지 기존 교회와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리를 사수하고자 스스로 ‘산제물’로 주님께 바쳤다.

 

얀 후스는 1371년경에 보헤미아 남부지역에 있는 후시네츠(Husinec)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90년경에 그는 프라하대학(카를 4세에 의해 1348년 설립되었기 때문에 카를대학으로도 불린다)의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그 무렵 체코의 프라하와 영국 런던은 정치적·사상적으로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잉글랜드의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1384년)의 사상이 프라하에 널리 소개될 수 있었다.

프라하대학에서 가르쳤던 교수들 가운데 팔레츠의 스테판(Stephen von Palecz)과 츠나임의 스타니스라우스(Stanislaus von Znaim) 등이 위클리프의 사상에 매료됐고 그들은 후스의 동료였다.

후스도 자연스럽게 위클리프의 작품을 소개받았고, 그의 저서들을 직접 손으로 필사하면서 공부했다.

후스는 1393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후스는 프라하대학에서 강의(1398-1399)를 하는 한편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다.

후스는 1403년 29살의 나이로 6개월 동안 프라하대학의 학장을 맡았고 1409년 다시 1년 동안 학장직을 수행했다.

후스는 1400년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1401년부터 프라하에 있는 성 미가엘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1402년부터는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가 됐다.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로서 후스는 향후 10여 년 동안 약 3,000번 이상 설교를 했다.

다만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배우지 못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문장으로 구성됐다.

더욱이 체코 사람들의 정서에 잘 맞는 찬송 가사를 지어서 대중적인 찬송을 보급했다.

그래서 일반 대중들은 찬송으로 신앙의 진리를 고백했다.

지금도 베들레헴채플 벽에는 당시 회중들이 함께 불렀던 찬송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후스의 설교는 프라하대학의 동료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 공감대는 설교를 듣는 일반 청중들에게로 확산되었다.

체코의 종교개혁 운동은 프라하대학과 베들레헴채플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이 두 곳에서 일한 개혁의 선구자가 바로 얀 후스였다.

 

이런 가운데 1406년 이후로 위클리프 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과 시비가 프라하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대체로 위클리프의 사상을 따르려는 후스와 그 반대편에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츠비넥(Zbynek)이 입장을 달리했다.

당시 프라하대학의 교수진은 후스를 중심으로 한 체코 출신들과 츠비넥을 중심으로 한 독일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위클리프 사상에 대하여 상반된 판단을 내리면서 상대방을 비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409년 1월 18일에 황제가 대학의 체제를 개편하였는데, 독일 출신 교수의 수를 대폭 줄이고 그 빈자리에 체코 출신의 교수들을 대거 채용했다.

그해 37살인 후스가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되자 체코 출신 교수들이 프라하대학을 이끌며 교회갱신과 사회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새롭게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추기경 츠비넥이 자신의 선출을 도와준 보답으로 1409년 12월 교서를 내려 후스를 공격했다.

그래서 후스는 설교금지 조치를 당했고 종교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후스에게 설교금지령을 내렸지만 후스는 굴복치 않았다.

그러자 교황은 1411년 3월 15일에 후스의 파문을 선포했다.

그러자 후스는 이제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 기성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에 대해서 공격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서 황제가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도 면죄부 판매를 통해서 그 일부를 자기 몫으로 가져갔으므로 재정적으로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스는 교황뿐만 아니라 황제와도 결별하고 말았다.

 

결국 후스는 1412년 11월 초순에 프라하를 떠나 망명길에 나섰다.

처음에는 어느 귀족의 보호 아래 프라하 근처에서 머물다가, 1413년 4월에 남부 보헤미아로 내려가서 코지 흐라텍(Kozí Hrádek)에서 지냈고, 이후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1414년 7월 이후에는 서부 보헤미아에 있는 크라코베치(Krakovec bei Rakoviník)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어디서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그의 설교언어는 중세교회의 라틴어가 아니라 토착 언어인 체코어였다.

 

1414년에 독일의 도시 콘스탄츠(Konstanz)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의회가 열렸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지기스문트(Sigismund)였다.

그 당시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었다.

더욱이 가톨릭교회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 황제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후스를 그 공의회에 참석시킨 이유가 그것이었다.

후스의 주위 사람들은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하면서 말렸다.

100년 뒤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장으로 나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당시 지기스문트 황제도 후스의 안전을 두 번씩이나 보장했다.

1414년 9월 1일 지기스문트 황제에게 자신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은 후스는 콘스탄츠로 향했다.

10월 11일 콘스탄츠를 향해 출발한 후스는 11월 3일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몇 주일 뒤인 11월 28일에, 그는 추기경의 명령으로 도미니칸 수도원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그 지하 감옥에서 후스는 벽에 묶여 있어서 누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후스를 심리하는 배심위원회가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참석아래 1414년 12월 4일 결성됐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후스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지기스문트 황제도 세 번이나 공개석상에 후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호하도록 주선했다.

공개석상에서는 주로 권위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주제로 부각됐다.

후스의 반대파들은 공의회의 결정이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후스는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서라고 주장했다.

후스의 반대자들은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했다.

 

종교재판소에서 교회는 후스에게 그런 요구를 했다.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날이 밝자 후스는 나무 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불을 당기기 전 후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불길 속에서 죽어갔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을 뜻하는 것이다.

철저한 개혁자요 신학자였던 후스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루터와 차이가

후스의 시대에는 인쇄술이 없어서 일일이 손으로 필사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루터는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것이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이 널리 퍼져나가지 못한 이유다.

1520년 2월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그 정도로 루터 자신도 후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한 것이다.

 

 

카를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옛 시가지 광장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생전에 진정한 신앙과 보헤미아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설교했던 틴교회당이다.

틴교회당의 광장 건너편엔 옛 시가지의 명물 시계탑이 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수많은 구경꾼 머리 위에선 모래시계 주위로 12개의 인형이 도는 짧은 공연이 펼쳐진다.

해골은 죽음을, 모래시계는 ‘유한한 인생’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쓰여 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얀 후스를 따라가는 여행코스

체코 후시네츠→프라하→얀 후스 동상(Pomnik Mistra Jana Husa)→베들레헴 체플(Betlemska Kaple)→코지 흐라텍(Kozí Hrádek)→크라코 베치(Krakovec bei Rakoviník)→모차르트의 집→독일 콘스탄츠

 

 

체코 출신의 예술가

문학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향수〉

프란츠 카프카, 〈변신〉, 〈성〉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지만 프라하에서 태어났고 프라하에서 공부했고 프라하에서 시인으로 출발했다.

 

음악

안토닌 드보르작, 대표작 교향곡 《신세계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라하에서 최고의 오페라로 인정받고 성공을 거두었다.

[참고도서]

주체코 한국대사관, 체코의 역사, 2011.

박태상, 〈동유럽 문화예술산책〉, 생각의나무, 2002.

황영관, 〈유럽 음악 기행-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편〉, 부키, 1999.

토마스 부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이종실 옮김, 동연출판사, 2015.

이은선, 〈체코의 거위(후스) 지금도 울고 있는가〉, 월드뷰(ISSN 2234-3865) 제30권 1호(통권 199호), 2017년 01월.

박경수, 〈얀 후스의 「교회」에 나타난 교회개혁사상〉, 장신논단 Vol. 47 No. 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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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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