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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와 삼자교회는 본래 하나의 출발점이다

by 권또또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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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인구의 7%를 차지하는 1억명 정도가 기독교인으로 알려 있다. 그 중 70%가 가정교회 교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는 삼자교회에 속한다.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차이는 뭘까? 무엇보다도 가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삼자교회는 정부와 공산당을 머리로 따른다는 것이다. 가정교회가 정교분리원칙을 하는 것이고 삼자교회는 정부의 통치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본래부터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한 건 아니었다. 그 출발은 하나였다. 중국은 A.D.635년 당 태종이 통치하던 시기에 기독교와 접촉을 했다. 이른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부인하고 인성의 완전함을 주장하던 5세기경의 네스토리우파의 추종자들이 중국에 들어와 ‘경교’를 전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보다 80여 년 앞서서 교회가 시작된 셈이다.

그 후 16세기 로마 가톨릭 소속인 예수회 수도사인 마테오 리치가 토착화 복음을 전했지만 청조의 건륭제에 이르러 로마가톨릭 선교는 문을 닫았다. 그 뒤 19세기 초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과 의료 선교사 윌리엄 로크하르트와 19세기 후반의 대영침례회에서 파송한 티모시 리처드와 영국의 중국복음선교회에서 파송한 허드슨 테일러와 스코틀랜드 장로회에서 파송한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가 선교활동을 펼쳤다. 미국에서는 미국 공리회의 선교사 브리지만과 아빌과 의료선교사 피티 파커와 1854년 미국장로회에서 삼자원칙의 토대로 중국 기독교 토착화에 힘쓴 존 네비우스와 상하이에 성 요한 대학을 창설한 사무엘 슈헤레스체프스키와 네덜란드선교회의 대표선교사인 독일인 귀츨라프도 중국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그 당시 중국최초의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을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은 ‘자치’ ‘자양’ ‘자전’을 내용으로 한 사역을 펼쳤다. 모리슨은 자치의 측면인 교회의 인재양성에 힘을 썼고 네비우스는 자양의 측면을 그리고 귀츨라프의 영향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자전의 측면을 강조한 사역을 했다. 바로 이것이 ‘삼자운동의 초석’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20-30년대가 중국교회 자립운동의 개화기라면 19세기 말은 자립교회로 가는 징검다리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중국 현지인 개신교 지도자 1호는 량파였고 초기 중국 목사 중 최고의 엘리트는 의사 출신인 시셩마였다.

그렇게 출발했던 삼자운동은 20세기 초에 ‘자립교회운동’과 ‘본색화운동’으로 나뉘게 된다. 자립교회운동은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자립교회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서구신학과 분리하고자 한 움직임으로 중국교회를 이끈 3대 거인 중 하나요 ‘근본주의’를 뜻하는 ‘기요파’의 대표자로 꼽히는 ‘왕밍따오’와 〈영에 속한 사람1-3권〉으로 널리 알려진 ‘워치만 니’ 그리고 ‘진텐잉’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색화운동이란 중국의 지식인 계층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으로 전통문화와 신학사항을 접목해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려는 목표로 출발했지만 중국 내에 불어닥친 1919년 5·4운동과 미션스쿨을 회수하려는 교권수호운동과 공산주의 사상에 맞춰 후에는 ‘삼자혁신운동’을 전개하며 중국 정부의 통치방침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본토화’ 혹은 ‘토착화’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본색화’를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는 우레이추안이 있고 주은래 총리 아래 제국주의 종교와 단절을 추진한 본색화운동의 지도자들은 우야오종 장쉐엔 그리고 자오즈천 등이 있다.

이렇듯 1920-30년대의 중국교회는 서구교회와 선교회로부터 재정적으로 또 사상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삼자운동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49년 공산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새로운 중국정부 아래 자립교회운동은 ‘지하교회’로 나아갔고 본색화운동은 ‘삼자애국교회’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그 무렵 삼자회의 지도자들은 여러 차례 왕밍따오에게 ‘삼자애국운동’에 적극 협력할 것을 권유했지만 정교합일을 반대하던 그는 공산당에 굴복하지 않음으로 지하교회 성도들에게 힘이 되었다. 그것은 ‘작은 무리’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 ‘소군교회’(小群敎會)의 지도자 워치만 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삼자교회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정치적인 죄목으로 기소돼 1952년 둥베이에서 당국에 체포돼 안후이 성 광더현의 노동개조수용소에서 복역하다가 1972년 5월 숨을 거뒀다. 아울러 산둥마장에서 창립한 예수가정교회의 징텐잉도 삼자회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이런 흐름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근 10년간 지속된 마오쩌뚱의 문화혁명기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 시기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하면서 더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돼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물론 이 기간에는 삼자애국운동 지도자들도 홍위병의 공개적인 타도 대상이 되었다. 그 무렵 교회당은 강제로 폐쇄되었고 교회 조직은 해산되었고 성경은 몰수돼 불에 탔다. 이렇듯 문화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 지나가는 동안 교회는 완전히 명맥이 끊어지는 것 같았지만 지하에서는 소그룹 형태의 교회가 끊임없이 탄생되고 유지되고 부흥되었다.

그 후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시기가 들어서자 1979년 중국 당국은 문화혁명 이전의 ‘종교 신앙 자유정책’을 집행토록 선언했다. 그런 상황에서 1980년 10월에 난징에서 제3차 전국기독교 회의를 개최했고 1982년에는 「19호 문건」이 선언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고 ‘삼자회의 부활’을 알렸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교회를 이끈 실제적인 중국교회의 지도자는 당광쉰인데 그는 본색화신학의 토대 위에 해방신학과 과정신학을 수용한 인물로서 사회주의 정치사상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79-19821년 무렵 가정교회도 종교신앙의 자유정책에 힙입어 잠시 부흥기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 시절 허난 지역의 한 가정교회에서는 개인 집을 개방해서 모일 때 매 주일 400-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광둥의 한 농촌에서는 1,000여명 이상 모인 곳도 있었다. 그렇게 가정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매우 강한 기적과 기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간벽지로 여겨지던 간쑤 성과 같은 작은 곳에서는 9만여 명의 신자를 얻는 결실도 거두었다. 하지만 1981년 말부터 삼자회의 압력과 이단의 문제와 목회자의 부족이라는 삼중고로 가정교회가 발전하는데 큰 방해를 받았다. 이런 모습은 현재의 중국체제의 지하교회도 결코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이같이 비록 양상과 대상의 차이는 있었으나 교회자립의 문제는 중국교회의 시작부터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러한 확신 속에 연구자는 교회 자립을 위한 모든 교회의 노력을 ‘삼자운동’으로 명명하고 이의 변천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하였다.”(357쪽)

 

진미수 교수가 쓴 〈중국교회 삼자운동 발전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가 왜 삼자운동의 변천사를 쓰고자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실은 여태까지의 중국 선교와 삼자운동의 모습들 그리고 지하교회와 삼자교회로 흘러가게 된 과정들을 정리한 것도 모두 그의 책을 토대로 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삼자교회’가 왜 이렇게 흘러오게 됐는지 이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 알 수 있게 됐다. 내 식으로 정리하자면 삼자운동의 출발점은 ‘자치’ ‘자양’ ‘자전’으로 선교사의 통치나 가르침이나 지원에 의존치 않는 자립을 토대로 한 것인데 가정교회는 영성을 강조한 개인구원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서양신학이나 교권주의나 정교일치에 반대입장 노선을 걸은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삼자교회는 중국 내 지식층의 신학자들이 자립을 기반으로 유교와 궤를 같이하는 토착화 신학을 강조했지만 후에는 왕권을 강화하는 사회주의체제에 협력하는 삼자애국교회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서로가 양립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흐름을 토대로 중국내에 복음전도가 활발하게 진행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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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흐름을 되짚는 그 과정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부록으로 나와 있는 북한교회를 재건하는데도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그만큼 현재 남한의 각 교단과 교파를 북한재건교회에 그대로 이식할 게 아니라 북한다운교회를 세우고 자립케 하는 기반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걸 절감케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한국교회에 너무나도 소중한 지침과 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귀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박천수 집사님께도 더욱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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